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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매력적인 펑리위안- 시진핑 부인

pia99 2017. 9. 2. 21:30

지금,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
어린 시절 대부분을 방랑극단서 떠돌던 국민가수, 중국 소프트파워의 핵심카드로 떠올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시진핑과 함께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그의 패션과 일거수일투족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가수 출신으로 퍼스트레이디에 오르기까지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월간중앙 2013년5월호』
신경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기자 xiaokang@joongang.co.kr

1989년 5월 15일 베이징 서우두공항.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현 러시아) 공산당 서기는 영부인 라이사와 함께 전용기 트랙을 내려왔다. 당시 라이사 여사는 소련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상징이었다. 천안문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은 부부의 등장에 열광했다. “우리는 고르바초프를 원한다”며 노골적인 지지 구호를 외쳤다.
2013년 3월 22일 중국의 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60) 국가주석이 탄 전용기가 첫 해외 순방지 모스크바 공항에 착륙했다. 시 주석은 영부인 펑리위안(彭麗媛·51)의 손을 꼭 잡은 채 트랙을 내려왔다. 8박9일간 러시아, 탄자니아, 남아프리카, 콩고로 이어진 순방 동안 펑리위안의 패션과 일거수일투족에 전 세계 언론은 “중국식 매력외교”라며 주목했다.
노래하는 퍼스트레이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는 가수다.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소속 가무단의 단장으로 계급은 현역 소장(한국의 준장)이다.
“고향 마을 어르신들/ 나는 산촌에서 살았어요/ 그곳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계시지요/ 수염 속에는 이야기가 가득하고요/ 천진스러운 웃음 속에는 고향 사투리가 숨어있네요.” 그녀의 대표곡 ‘고향 마을 어르신들(父老鄕親)’의 토속미 넘치는 가사다. 노래처럼 펑리위안은 세련된 도시와 거리가 먼 농촌에서 태어났다. 1962년 11월 20일 수호지의 영웅 송강(宋江)의 고향인 산둥(山東)성 허쩌(菏澤)시 윈청(鄆城)현 황투이지(黃堆集)향의 펑씨 집향촌 출신이다. 아버지 펑룽쿤(彭龍坤)은 윈청현의 문화관 관장, 어머니는 지방극단의 단원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방랑극단의 소달구지 위에서 보냈다.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 공연하는 부모를 따라다니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쌓았다.
14세가 되던 해 펑리위안은 2년제 중등전문학교인 산둥 ‘5·7’ 예술학교(1978년 산둥예술학원으로 개명)가 문화대혁명으로 중단됐던 학생모집을 재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닝(濟寧)시로 시험을 치러 가야 했지만 마침 뇌막염에 걸린 동생 때문에 함께 갈 가족이 없었다. 아버지는 석탄 트럭 운전사에게 담배 두 보루, 음악 선생에게 여비 10위안을 주며 딸의 시험에 동행을 부탁했다. 당시 펑리위안은 작고 여위었다. 누런 얼굴에 양 갈래로 딴 머리는 촌티가 가득했다. 주임 시험관은 “넌 좀 기다려라, 다른 사람들이 시험을 다 마친 뒤에 다시 부르마”라고 말했다. 밤 11시40분 시험관들이 돌아갈 준비를 할 때서야 펑리위안이 생각났다.
펑리위안은 시험관 앞에서 “태양은 제일 붉고 마오 주석은 제일 친밀하다(太陽最紅毛主席最親)”는 노래를 불렀다. 어수선하던 시험관 석이 일순 조용해졌다. 한 시험관이 “괜찮은데, 한 곡 더 부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혁명가 ‘난니완(南泥灣)’을 불렀다. 네댓 명만을 선발한 지닝시 지역 합격자 명단에 펑리위안이 포함됐다.
◇중국 최고의 초상화가 진샹이의 모델
펑리위안은 산둥예술학원에서 민족창법의 대가 왕인쉬안(王音璇)의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반에서 둘째로 나이가 어렸다. 동기생 쉬청위에(徐承躍)는 “(펑리위안은) 순박하고 선량한 농촌 자매 같았다”며 “부모가 모두 극단에 있어서인지 그녀의 무대 경험은 (반에서) 최고 수준이었다”라고 회상한다.
1980년 펑리위안은 왕인쉬안을 따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민족민간창법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펑리위안은 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베이징음악보>는 “민족창법은 장래가 밝고, 뒤를 이을 마땅한 사람이 있다”며 펑리위안을 주목했다. 18세 스타의 탄생 순간이었다. 당시 대회장에는 북유럽 6개국 순방 공연을 준비하던 지난(濟南)군구 정치부 전위가무단 단장 쑨정(孫正)이 있었다. 그는 펑리위안을 스카우트했고, 펑리위안은 해외공연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펑리위안은 어려서부터 군대를 동경했다. 그녀의 이모부는 황푸(黄埔)군관학교 출신이고, 외삼촌은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갔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문혁 기간 우파반혁명 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이 때문에 그녀에게 카키색 군복은 문혁의 아픔을 떨치고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묘약처럼 다가왔다.
1981년 펑리위안은 중앙음학학원의 연수통지서를 받았다. 통지서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작은딸 덩룽(鄧榕)의 음악선생이던 리닝(李凌) 중앙음악학원 원장이 보냈다. 리닝은 1980년 12월 광저우 양청(羊城)음악회에서 펑리위안의 노래를 들었다. 그는 산둥성 전위가무단을 세 차례나 직접 찾아가 펑리위안을 영입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리닝은 성악 전공자가 아니었다. 대신 명 가수조련사인 진톄린(金鐵霖)에게 그녀를 맡겼다. 중국의 국민가수 쑹쭈잉(宋祖英), 둥원화(董文華) 등이 모두 진톄린의 제자다. 진톄린은 일찍이 ‘민족가수’로 시대를 풍미한 리꾸이(李谷一)의 첫 교사이자 첫 남편이었다. 하지만 리꾸이는 진톄린과 헤어져 전 해군사령원 샤오진광(蕭勁光)의 아들 샤오쭤넝(蕭卓能)과 재혼했다. 진톄린은 펑리위안에게 미성창법을 사사했다. 펑리위안은 그에게 과학발성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1990년 펑리위안은 중앙음악학원에서 중국 첫 민족성악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펑리위안은 1982년 중국중앙방송(CC-TV)의 설 특집 버라이어티쇼 ‘춘제롄환완후이(春節聯歡晩會)’에 첫 출연한다. 이때 부른 ‘희망의 들판에서(在希望的田野上)’가 인기를 끌면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펑리위안은 2007년까지 중국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이 프로그램에 25년간 고정 출연했다. 방송 출연을 계기로 펑리위안은 산둥군구 전위가무단에서 총정치부 산하 가무단으로 자리를 옮긴다.
펑리위안은 유명인사였다. 대학원 과정 중이던 1984년 주말을 틈틈이 이용해 중국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진샹이(靳尚誼)의 유화 ‘청년여가수’(사진)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진샹이는 중국 퍼스트레이디의 초상화를 30년 먼저 그린 셈이 됐다.
◇1983년에는 김정일 앞에서 ‘꽃 파는 처녀’ 부르기도
펑리위안은 군인이다. 위문 공연이 주특기다. 20여 년간 일선 부대와 전선을 누볐다.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1984년 라오산(老山, 중국-베트남 국경도시) 전선이었다. 동생 펑레이(彭蕾)가 참전 중이었고, 나는 중앙음악학원에 다니던 중이었다. 총정치부 위추리(余秋里) 주임이 전선으로부터 ‘총정치부 가무단의 명가수는 왜 오지 않나? 펑리위안 같은 스타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공연 명령을 내렸다. 나는 곧 학교에 결강을 요청했다.”
<남도주간(南都周刊)> 최근호에 실린 펑리위안의 회고다. 펑리위안은 동료 가수들과 함께 헬멧을 쓰고 지프에 탄 채 7~8시간을 달려 라오산 주봉 최전방진지에서 불과 4m 떨어진 참호에 도착했다. 양편에 지뢰가 매설돼 길 가운데로만 지날 수 있었다. 지척에서 대포와 기관총 소리가 생생했다.
“사실 매우 겁이 났어요. 젊고 아직 남자 친구도 없는데, 총알 한 발이라도 날아온다면 여기서 죽는구나. 일생이 이렇게 순식간에 끝날 수 있구나. 잠시 더 생각해보니 이것 역시 운명이다.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죽지 않으려 해도 죽을 것이고, 죽지 않을 운명이라면 죽으려 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오산 전선은 마침 산둥군구가 담당했다. 병사들은 펑리위안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펑리위안이 왔다. 고향사람이 왔다”며 기뻐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담배와 사탕을 나눠주고 노래를 불렀다. 병사들은 고향의 누이, 부인, 어머니를 떠올리며 울었다. 공연을 마칠 시간이 되자 병사들의 사인 요청이 쇄도했다. 변변한 종이가 없었다. 병사들은 팔뚝, 등, 옷가지와 모자를 들이 밀며 사인을 요청했다.
펑리위안의 인기가 치솟던 80년대 중반 중국은 스타들의 전성시대였다. 공연 요청이 쇄도했고 출연료로 수십만, 수백만 위안을 벌어들였다. 펑리위안은 달랐다. 출연료 대신 군부대를 찾았다. 북한, 러시아,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와 마주한 변경부대를 누비며 위문공연에 주력했다. 순간의 인기보다 미래의 꿈을 키웠다.
높은 인기는 펑리위안에게 최고지도자와 접촉할 기회도 선사했다. 김정은 현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태어난 1983년. 김정일 당시 북한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펑리위안이 환영 만찬장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김정일이 가장 좋아한다는 ‘꽃 파는 처녀’를 한국어로 멋지게 불렀다. 김정일 왼쪽 자리에는 4년 후 그녀의 시아버지가 될 시중쉰(習仲勳)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가 앉아 있었다.
1984년 10월 1일 일본 청년 3000명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중일 청년들이 수도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펑리위안은 일본 유명가수 세리 요코(芹洋子)와 듀엣으로 일본 민요 ‘사계절의 노래’를 불렀다. 현장에는 후야오방(胡耀邦) 중공 중앙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 전국청년연합회 주석, 시중쉰 중앙서기처 서기가 귀빈석에 앉아있었다.
펑리위안의 트레이드마크는 수수함이다. 홍콩의 중국 반환기념 공연에 참가한 펑리위안이 <명보(明報)>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예상보다 인터뷰가 길어져 공연 시간이 가까워왔다. 그녀는 혼자 화장과 머리손질을 하면서 인터뷰 질문에 답했다. 이 모습을 본 홍콩 기자는 “당신은 화장도 머리손질도 스스로 하나요? 홍콩에서 당신 정도의 스타라면 전용 스타일리스트가 있는데…”라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수수한 펑리위안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2006년 한·중 가요제 참석을 위해 방한한 펑 여사는 수행원이 없었다. 당시 KBS 관계자는 “펑리위안 여사는 매우 소탈하고 순수했다”며 “저장성 서기의 부인이자 현역 장군인 그녀가 수행원도 없이 직접 화장하고 혼자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시진핑과 서로 첫눈에 반하다
펑리위안과 시진핑의 만남은 1986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한 친구가 집에서의 만남을 주선했다. 시진핑은 1980년대 초 전 주영대사 커화(柯華)의 딸 커링링(柯玲玲)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헤어진 상태였다. 만 24세이던 펑리위안은 아홉 살 연상의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상무부시장 시진핑이 외모를 중시하는 인물인지 시험하고 싶었다. 치장대신 뚱뚱해 보이는 큰 사이즈의 군복바지를 입고 나갔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더 촌스러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까지 꽤 들어 보였다. 실망했다. 하지만 진솔한 대화가 그녀의 선입견을 바꿨다.
시진핑은 “출연료는 얼마나 받나요?”라는 류의 통속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성악에는 몇 가지 창법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펑리위안은 정성껏 대답했다. 시진핑은 이어 “미안한데 내가 TV를 안 봐서 모르는데 당신은 요즘 어떤 노래를 부르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희망의 전야에서’를 불러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시진핑은 “네! 그 노래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아주 좋아요”라고 맞장구쳤다. 현대 중국어에 ‘이젠중칭(一見鐘情)’이란 말이 있다. ‘첫눈에 반하다’라는 뜻이다. 펑리위안과 시진핑의 첫만남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때 나는 마음이 흔들렸어요. ‘이 사람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일까? 순박하고 생각도 깊은데’ 훗날 그가 나에게 ‘만난 지 40분도 안돼 나는 당신이 내 아내가 될 사람으로 결정했다’고 말했어요.”
난관도 있었다. 펑리위안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다. 고급 간부의 자제 중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며 딸이 힘들게 살지 않도록 결혼을 말렸다. 시진핑이 나섰다. “내 부친도 농민의 아들이고 붙임성이 좋으신 분입니다. 집안의 결혼 상대도 모두 평민 자제를 찾으십니다”라며 펑리위안의 부모를 설득했다.
1987년 9월 1일 베이징의 펑리위안이 시진핑의 전화를 받았다. 샤먼으로 내려간 펑리위안은 사진관을 찾아 결혼사진을 찍고 결혼 등기를 마쳤다. 지인들과 단출한 식사가 결혼식의 전부였다. 신혼 4일 째 펑리위안은 베이징으로 돌아와 전국예술제에 참가했다. 곧이어 캐나다, 미국으로 공연을 떠났다. 이후 부부는 함께 지낸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1992년 6월 27일 딸이 태어났을 때도 시진핑은 푸젠성을 내습한 3호 태풍 보비와 맞서고 있었다. 3일 밤낮으로 퇴근조차 못했다. 산모와 딸을 보러 갈 형편이 아니었다.
◇너무나 매력적인 펑리위안 스타일
“펑리위안의 가방은 중국산이다.”
지난 3월 22일 펑리위안의 패션 신상털기에 나선 중국 네티즌 수사대는 환호했다. 제1부인의 의상이 외국 명품 브랜드가 아닌 중국 여성 디자이너 마커(馬可·42)의 작품으로 밝혀지자 중국뿐 아니라 세계가 놀랐다. 그녀의 브랜드 ‘우융(無用)’은 인기 검색어로 떠올랐다. 마커는 1996년 전 남편인 마오지훙(毛繼鴻)과 함께 패션업체 ‘리와이(例外)’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2006년에는 ‘쓸모 없는’ 브랜드 ‘우융(無用)’을 런칭했다. 중국의 도교 사상을 접목시킨 디자인이 호평을 받았다. ‘우융’의 성공드라마를 담은 영화감독 자장커(賈樟柯)의 다큐멘터리는 베니스영화제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펑리위안-마커 팀이 중국판 ‘완판녀(완전 판매를 일으키는 여인을 뜻하는 신조어)’대열에 올랐다.
펑리위안 스타일은 위력적이었다. 미국의 현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2008년 NBC에 제이크루의 의상을 입고 출연한 것이 확인되면서 제이크루의 주가를 하루 만에 8%, 1주일 만에 25% 급등시킨 바 있다. 시진핑 부부의 첫 해외 순방기간 동안 토종 브랜드인 다롄(大連)의 양복업체 다양촹스(大楊創世)는 3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비판도 나온다. 4월 5일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넘치는 재고량과 과당경쟁으로 중국 토종 스포츠의류 브랜드 리닝이 2012년 한 해 동안 1821개 매장의 문을 닫았다고 펑리위안 신드롬의 거품 가능성을 경고했다.
펑리위안은 본래 국산 애호자는 아니었다. 몇 해 전에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녹색 군복 롱코트에 루이비통 핸드백을 들고 양회(兩會·국회 격인 전인대와 정치협상기구인 정협회의)에 출석하는 사진이 보도됐다. 당시 펑리위안이 든 가방은 루이비통의 멀티플리 시테 모델로 해외에서 1330달러에 팔리던 제품이었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그때도 펑리위안의 루이비통 가방이 군용 코트와 잘 어울린다고 반응했다. 중국인은 그만큼 펑리위안을 사랑했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펑리위안은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녀의 변신 뒤에는 전 외교부 부부장 푸잉(傅瑩·60)의 영향이 켰다고 홍콩 <아주주간(亞洲週刊)> 최신호가 보도했다. 은백색 머리가 인상적인 여걸 푸잉이 펑리위안 스타일의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 리청(李成) 중국센터 주임은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줘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필요성이 펑리위안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펑리위안을 둘러싼 가십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펑리위안을 ‘국모(國母)’로 표현한 웨이보(중국판 트위터) 계정이 갑자기 폐쇄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사샤(12)와 말리아(15) 두 명의 ‘퍼스트 도터(first daughter)’가 있다. 시진핑 주석의 ‘퍼스트 도터’ 시밍쩌(習明澤·21)는 호리호리한 외모의 소유자다. 지난 연말 유학 중이던 하버드 대학을 자퇴하고 비밀리에 귀국했다. 시진핑 주석의 특별 지시였다고 한다. 시 주석은 줄곧 “바른 사람은 먼저 자기를 바르게 한다(正人先正己)”고 말했다. 시밍쩌의 귀국 소식에 자식과 부인을 해외로 내보낸 ‘나관(裸官)’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반부패 사정 바람의 사전조치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베이징 정가 소식에 밝은 한 홍콩의 시사월간지는 올 초 시밍쩌의 귀국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정치적 이유다. 지난해 5월1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하버드대에서 열린 중국 정치 혼란에 대한 학술 토론회장의 맨 뒷줄에 단정하게 앉은 학부생이 중국국가부주석 시진핑의 딸 시밍쩌였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유서 깊은 카파알파테타 여학생회 활동에도 참가했다. 만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이 그녀의 활동을 악용하면 시진핑의 권위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점이 고려됐다. 둘째, 안전 문제다. 지난해 12월 14일 발생한 미국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사건으로 미국 안전 신화가 깨졌다. 게다가 중국 반체제 인사의 위해 가능성도 제기됐다. 중국의 중앙경위국과 정보기관 사이에 비상이 걸렸었다는 후문이다. 셋째, 학업 부담도 한 이유가 됐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시밍쩌였지만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그녀에게 하버드가 요구하는 학습량은 큰 부담이었다. 시밍쩌의 가까운 친구는 그녀가 시종 긴장 속에서 여유 없이 지냈다고 말한다.
시진핑 총서기가 첫 지방 순찰 중이던 지난 해 12월7일 밤. 선전(深圳)시 영빈관에서 시진핑의 노모 치신(齊心·86)과 딸 시밍쩌까지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시밍쩌의 유학 포기는 할머니 치신, 펑리위안, 시밍쩌 본인까지 세 여인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장쩌민의 손자 장쯔청(江志成)은 하버드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양제츠(楊潔篪) 현 외교담당 국무위원의 딸 양자러(楊家樂)는 예일대에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시밍쩌는 미국 명문대의 첫 유학생은 아니었다. 자퇴하고 돌아온 첫 고관자제다. 또한 미국 유학을 중도에 그만둔 마지막 고관자제도 아닐 것이다.
◇‘정치파워’는 정치국위원보다 앞서
펑리위안은 유력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화려한 직함이 이를 웅변한다. 인민해방군 예술학원 총장, 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 제8·9·10기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을 비롯해 세계보건기구(WHO)의 에이즈·결핵 방지 친선대사 등 그녀의 직함은 무수히 많다. 올해 선정된 11기 정협위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빠지자 해외 언론이 그녀의 ‘조용한 내조’를 전망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직도 그녀가 다른 직위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펑리위안은 지난해 시진핑의 총서기 등극에도 일조했다. 중화전국청년연합회 네트워크를 활용해서다. 그녀는 청년연합회 부주석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역임했다. 청년연합회는 태자당인 시진핑이 취약한 공산주의청년단의 주축을 이루는 단체다. 홍콩의 월간 <명경(明鏡)>은 지난해 “(펑리위안의 노력으로) 많은 후진타오 수하의 공청단 인사가 시진핑 쪽에 의지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벌써 충성을 맹세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관영 매체의 펑리위안 동정 보도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 3월 26일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1면의 톱기사 마지막 문장은 “펑리위안, 왕후닝(王滬寧), 리잔수(栗戰書), 양제츠 등이 상술한 활동(시진핑 연설)에 참가했다”였다.
중국에서 국가급 주요 지도자가 참여하는 동정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정치서열 순으로 참석자를 열거하는 것이 전통이다. 정치국 상무위원 급은 부제목으로 올라간다. 정치국위원과 국무위원은 이름을 올리고 장관은 ‘등’에 포함시켜 생략하는 것이 관례다. 이날 기사에서 펑리위안은 왕후닝, 리잔수 앞에 위치했다. TV카메라에 잡힌 그녀의 좌석도 왕후닝 옆이었다. 3월 30일 국영 통신사인 신화사가 배포한 시진핑 귀국 기사는 “시진핑 주석 부인 펑리위안, 중공중앙정치국위원·중앙정책연구실주임 왕후닝, 중공중앙정치국위원·중앙서기처서기·중앙판공청주임 리잔수, 국무위원 양제츠 등 수행인원이 같은 비행기로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펑리위안의 정치파워가 정치국위원보다 앞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국외교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나아가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가는 과정”이라며 “지나친 정치적 해석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먼 지방 사람이 복종해 오지 않으면 문덕을 닦아 그들을 오게 하라(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고 말했다. 펑리위안의 ‘매력 외교’는 시진핑의 외교가 강조하는 소프트파워의 핵심카드다. 결과가 고르바초프의 부인 라이사 여사와 같이 한때의 드라마로 끝날지, 중국의 궁극적인 변화를 불러올지는 그녀의 행보에 달렸다.

 

 

 

 

------------펑리위안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나의 흥미를 끌어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보통 여자들은  선자리가 소개팅 자리에 나갈때 어떻게 하고 나가나?  최대한 예뻐보일려고 치장을 하지. 그런데 이여자는???

  그리고  그 젊은 날에  남자가  자신을  돈으로 보고 있는지, 외모를 보고 있는지, 그녀 자체에 관심이 많은지를  알아볼수 있는 분별력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무 놀라운데~~

  펑리가 여자들한테 쓴소리를 한 글이 있는데 이것또한 명언이다.

 

  이런 펑리가 선택한 남자가 바로 시진핑!

    사고가 깊은 펑리를 만들게 한 요인이 집안 환경도 한몫했다는 것도  알수 있는 대목이 있다. 집안 사람들이 고관대작들 자제중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많다!라는 지론에 의해 시진핑을 사위감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와우~~ 놀라운데 집안도 또한!

  이런 통찰력까지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라서 그 젊은 날  그런 안목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해본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말이다.

 

 

    그녀의 포스가  남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