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문득 문득 떠오른 생각은 나의 조부모님의 살아생전 모습과 말씀이었다.
나의 할어버지는 이제 내가 직접 경험했던 인물들 중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나의 넘버 원이다.
내가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할머니께서 어린 나에게 구구절절 말했던 내용이다. 할아버지는 남들이 고무신 신고 다닐 때, 짚신을 신고 다녔고, 남들이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닐때,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남 줘봤자 소용 없더라. 너는 그렇게 살지 말거래이가 할머니의 당부 말씀이었다.
여기까지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본 모습이었고, 내가 어린 날 할아버지를 본 모습이다.
겨울날, 방에서 할아버지와 지금으로 보면 비서(?) 아저씨랑 돈 뭉치에서 10만원(?) 그 정도 액수로 분리하여 열심히 작업을 하고 계셨다.
은행에서 거금을 찾아와서 열심히 두분이서 돈을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궁금해서 비서아저씨한테 물어봤다.
그 왈, " 연말이라, 동사무소에서 극빈자 목록을 받아서 그 들에게 연말 선물로 줄려고 나누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나는 너무 어려서 그런지 돈 욕심이 없어나보다. 할아버지 저한테도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보니 말이다.
위와 같이 나에게 충고하신 할머니조차 그런 모습을 덤덤히 보고 계셨다. 기부금을 환산하면 1980년대 초반이니 상당히 큰 액수라고 여겨진다.
이제부터는 타인이 할아버지를 본 모습이다.
1.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 제 초대 회장 인촌 김성수 [金性洙이 고창 성내면 출신이다. 이곳은 나의 할아버지 고향이기도 하다. 이미 알다시피
김성수는 독립운동 지원했던 분으로 유명하다. 이 분과 나의 할아버지가 얽혀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께서 바삐 대나무 죽통을 들고 길을 가다가 동네 사람을 만났다. 그 동네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니 할아버지 왈,
김성수씨가 독립운동 자금을 댄다고 하니 나도 조금이라고 도움을 줄려고 돈가방이 아니라, 돈을 몰래 죽통에 담아서 가져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 죽통은 떡이나 음식을 담아가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2. 충렬사 대문 보수 공사를 해야하는데, 정부가 돈이 없던 때라, 누군가의 후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 옛날 한국이 못살았던 때,
한옥 인간문화재 아저씨의 목격담이다.
이 분이 그 때, 충렬사 대문 공사를 맡은 책임자로 향교에서 이 문제를 의논하러 갔다. 관리자가 저 멀리 검정 자전거를 타고 향교로 들어오는 사람을
가르키면서 "저분이 향교 교장으로 충렬사 대문 지원을 하신 분이네"라고 해서 보니, 이렇게 돈이 많으신 분이 검소하기 그지 없는 모습일 줄이랴 상상을 못했다고 하였다. 나에게 문화재 아저씨께서는 "너의 할아버지를 존경한다. 그 분과의 그일로 인해 인연을 맺고 그 분의 자식대에까지 인연을 맺었는데 너와도 인연을 맺고 싶구나. 이렇게 되면 삼대째인데..."
3. 할아버지에게 돈을 꾸어간 사람이 2년간 돈을 안갚고 있다가 원금만 들고 나타났다. 할아버지께서는 차용증이 며느리에게 있으니 며느리한테 가서 주면 된다고 하였다. 며느리(나의 엄마)한테 그 사람이 가서 원금만 내밀자, 며느리가 2년만에 나타나 이자도 없이 원금만 줄수 있느냐고 하면서 법적으로 처리할테니 차용증을 못주겠다고 하자 며칠후 며느리한테 다시 이자와 함께 가져와서 차용증을 받아가면서 하는 말" 할아버지가 이 말을 며느리한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다시 할아버지에게 가서 며느님께서 이자 안주면 차용증 안주겠다고 말하니 할아버지께서 이자를 주면서 이 돈을 며느리에게 가져다 주라고 했다"
이말을 들은 며느리는 아버님의 큰 뜻을 알고 이런식으로 옆에서 보고 배우면서 자라났다고 하였다. 즉 내 엄마가 시아버님을 옆에서 보면서 유학에서 말한 德을 실천하는 모습을 배웠다고 한다. 한마디로 가풍을 배웠나갔다는 의미겠지.
4. 내가 서울에서 용산 공원에 놀려가니 그 곳은 지역 주민이 아침마다 오는 산책 코스라 만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된다.
정자에 쉬고 있으려니 안면이 익은 아저씨가 오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고향을 묻게 되었다.
똑같은 고향이었다! 이럴수가. 타지에서 그 조그만 시골이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그 아저씨왈, **이면 혹시 ***(나의 할아버니 존함)을 아는가?"
나 : 네 ? (깜짝 놀란 표정) 그 분을 아저씨는 어떻게 아시나요?
아저씨 : **출신 치고 그 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나 : 그 분이 제 할아버지예요.
이제는 아저씨가 놀란다. " 뭐라고 ! 네가 그집 손녀란 말인가? 그 집 며느리가 ***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하시나?"
나: 거기까지 소문이 났어요?
아저씨 : 물론이지. ***(할아버지 존함) 며느리 *** (엄마 직업 )
그 다음날 그 아저씨는 자기 친구를 데리고 와서 나에게 소개를 시켜주시더니, 대뜸 친구분께서 자기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정말 옛날일이다. ㅋㅋ 내 생전 처음으로 외지에서 할아버지와 엄마의 유명세를 경험했던 사건이었다.
5. 정자 건립 -지금도 그 곳에 가면 할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큰 2층 정자가 턱 하니 도로 가에 버티고 서있다. 마을 주민들이 와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라고 한다.
6. 쓰러져가는 향교를 일으켜 세움
7. 자녀 결혼식날 축의금 제도 없애버림
옛날이냐 축의금 품앗이가 좋은 제도 였지만, 그 당시에도 축의금이 축하객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간파하셨다.
이제까지 낸 축의금이 아까워서라도 받을려고 하는 분들도 있다. 할아버지는 이런 욕구를 잘라버리고 그 날은 부담없이 와서 마음껏 즐리도록 베푸셨다
--- > 훗날 내 부모님도 할아버지 뜻을 살려 자식 결혼식날 축의금 안받으심
8.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핍박 받을 시절에 지방에 와서 연설을 해야 하는데 장소가 없을 때, 할아버지 친구분께서 기꺼이 장소를 제공하고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연설을 들을 수 있겠되었다. 문제는 그 후에, 장소 제공자를 정부는 찾아내어 할아버지 친구 분을 감옥에 쳐 넣어버렸다.
그 친구분의 친구들은 아무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 혹시 자신에게 헷고지를 당할까봐서이다.
유독 그런 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수감되어 있는 친구를 찾아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의 할아버지!
" 내 친구가 수감되어 있는데 찾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하면서 당당히 찾아갔다고 했다.
이외에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를 겪어본 주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할아버지께서는 자기가 하는 일을 자랑삼아 누구한테 말하지 않는 분이라고 하셨다.
지금 대학교 기금 발전에 누구누구 대서특필에 학교 회보에 총장과 손잡고 찍은 사진을 널리 유포하는 것이 비일비일한데 말이다. 난 이런 사진들을 볼때마다
나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이런 분을 내가 직접 옆에서 봤고 그 분의 핏줄이라는 것이 이리도 자랑스러울수가..
할아버지가 매년 불우이웃 돕기에 성금을 한 돈으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나 절에 기부하면 그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안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지역 불우이웃돕기하는 것이야말로 나한테 이득없는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대학기금내면 지금 내 학교에도 동판에 기부자 이름 동판에 새기듯이 ,그런 짓을 댓가로 해줄텐데..
할아버지의 이런 지역 사랑에 시청도 알아주었는지,
할아버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감사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 그리고 훗날 할아버지 존함이 써 있는 공적비가 세워지게 된다.
향교 교장님답게 할아버지는 공자님 말씀대로 정말정말 언행일치대로 사실려고 한 분으로 내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호위호식하셨냐 그것도 아니었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푸념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본 할아버지는 자가용이 없었다. 언제나 흰고무신에 자전거.
아버지한테 물어봤다. 그 당시에도 자가용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그 사람들 어떻게 되었냐고. 아버지왈, 사업이 망해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구.
불교에서 말한 무주상행보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할아버지 같은 분을 만나지 못햇다. 물론 이런 분들은 워낙 자기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내가 못알볼수도 있겠다.
이제는 나의 할머니에 대해 말해보겠다.
이런 할아버지에 대해 푸념하고 계시는 할머니였지만, 할아버지의 순수한 맘에 충분히 동의하고 할아버지의 검소함을 함께 누리신 분이었다.
할머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할아버지는 그렇게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부창부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가 호사스럽게 누리지 못한 모습에 연민이 들었던 것이지만, 할머니 또한 그러하셨다.
손자 손녀에게 검약하게 사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었다. 손주들 구멍난 양발을 보기좋게 메꾸어 주어서 눈에 확 띠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 양발좀 사주세요. 부잣집 손주들이 이렇게 입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할머니는 픽 웃어버리셨다. 어린 나는 이런 할머니의 당당한 모습에서 '겉모양의 빈약함'에 별로 신경안쓰는 인간으로 자라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월세 150만원을 내는 벤츠녀가 2달 내고 월세를 안내고 버티고 사는 여자 이야기를 들을 때, 동부이촌동에 사는데, 그것도 하우스메이트로 들어가 살면서 자기집에 산다고 뻥치고 다니면서 카드 미납으로 독촉장 받는 여자 이야기, 38살 남자가 BMW를 끌고 다니면서 지금 당장 신용대출로 돈 400만원을 못 마련하는 상황을 봤을 때,
아버지는 경비일하는데, 집은 3억원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5천원만원짜리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미시족들.. 등등 살면서 많이 이런 경우를 접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인데 럭셔리하게 살기 위해 소비한 댓가로 할부인생. 언제 신불자에 빠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들..
아직 내 오빠는 차가 없는데... 이들보다는 잘 사는 것 같은데 말이다.
차가 없어서 여자가 없나? ㅋㅋ
이런 사회가 되어감에도 내 가족들이 꿋꿋이 할아버지 만큼은 아니더라도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종가집 답게 할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은 자손이 번창하는 것이었다. 공자 말씀대로 살면 자손이 번창한다고 했었나보다.
충효정신. 삼강오륜.
나의 증조 할머니는 동네에서 효부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했다. 그리고 훗날 효부상을 받아서 비석이 고창에 세워지게 된다.
나의 할아버지도 증조할머니의 효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증조할머니에게 지극정성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염원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았고 , 나와 나의 형제들은 직접 조부모와 부모의 삶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가풍을 배울려면 옛날 대가족 제도가 맞다고 본다.
몇년 전에 할아버지께서 지극정성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 했던 도시를 오빠와 내가 방문했다.
곳곳에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있었다. 흔적들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지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충렬사의 대문을 보면서, 누곽을 보면서 눈물이 나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옆에 있던 오빠에게 " 오빠, 나.... 눈물 날려고 해 "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너무 너무 삶을 정직하게 성실하게, 덕성스럽게 살아가신 분이었고, 이런 분을 뵙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는 극소수화 되어 간다.
어린날에는 늙으면 다들 내 조부모처럼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점점 들어보니, 내 자신도 조부모처럼 살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소수자의 당당함이라들지, 줏대강하고 그것을 밀어부치는 뚝심은 물려 받았지만 말이다.
종가집이 괜히 종가집이 아니라는 것을... 내 추정컨대 종가집이 옛날에는 지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보여주었던 사회적인 장치였던 것 같다.
종가집에 대한 격식과 그 때 당시의 일반인들이 종가집에 대한 인식을 봤을 때 말이다. 허나, 지금 사회는 종가집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돈이 많으면 된다. 뭘고 벌었던지 우선 돈 많은 부잣집이 종가집보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다보니, 돈이 많을려면 기부는 무슨 기부???? 기부할려고 해도 좀 자신을 내세우고 대접받는 곳에 아주 잘 기부한다. 영리한 것이지.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기부를 받을 단체는 이런 인간의 욕구를 잘 캐취하여 기부엔 테이크를 잘 해주면 되는 것이구..
지금 내가 가슴 아프고 슬픈 것은.
나의 부모님이 조부모님을 많이 닮으셨다. 내가 경험했던 ,조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감명받고 교훈을 얻은 것들을 대를 이어 내 조카들이 내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나처럼 깨닫고 닮아가기를 바라는데, 내 부모님의 나이를 계산해 볼 때, 그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겉모습에 치중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자존감이 무너지는 사회의 작태 속에서 할아버지처럼 꿋꿋이 살아갈수 있는 힘이 결국 직접 모델을 보고 사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이 글을 적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도 내 기억속에서 하나씩 살아질까봐..
나는 조카들에게 종가집의 자손들은 어떤 맘으로 살아야 하는지 전해 주어야 할 의무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할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겨진다.
아니면 혼자 스스로 깨닫던지.. 유전인자는 있으니까 ㅋㅋ
요즈음 엄마와 내가 할아버지의 선견지명과 행적들에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같이 운다.
할아버지께서 유언에 자손들은 할아버지 고향 땅에서 생산된 쌀을 꼭 먹으라고 농지를 팔지 말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서 쌀이 나와서
엄마가 나에게 보내준다. 고창 쌀.
어떤 일이 있어도 농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고 ...
할아버지, 할머니 이 두분 내외를 보면 역시 부부는 끼리끼리 말에 동감한다.
성격은 달라도 삶을 순수하게 살아가셨던 분이다. 내가 먹지 못해도, 내가 좋은 옷을 입지 못해도, 종가집의 사회적인 의무감은 지키셨던 분이다.
나는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나오는 유학사상을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이런 분을 내 인생에서 단 한번 만이라도 가까이서 뵙게 되는 행운을 누린것에 대해 하늘에게 감사드린다.
물론 피도 물려받는 것에 대해서도!!!
나의 독특한 기질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했더니 할아버지였어 !
더 윗대로 올라가면 시조 장유에게서 나온 것이겠지. 그 분이 시조가 된 이력도 독특하거든..
한자로 베풀장
할아버지는 우주의 법칙을 이미 알고 계셨어.... 공자의 말씀대로 산 것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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