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 , 1875-1948)는
당시는 남부 헝가리에 속했던
베오그라드 북서부 지역에서 살았던 세르비아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여자로서는 특별하게
김나지움에 입학허가를 받아서 공부했는데,
특히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학교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그녀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1896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바로 여기서 4살 아래인 아인슈타인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서로 간에 일이 잘만 되었더라도
후일 퀴리부부에 버금가는 새로운 과학자 부부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1986년 아인슈타인의 맏아들인 한스 알버트 아인슈타인(Hans Albert Einstein)에 의해서
처음으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에서
1897년부터 1903년 사이에 오갔던 편지가 공개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는
사생아 리제를(Lieserl)의 이야기를 포함한 아인슈타인의 사생활과
당시 아인슈타인이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주제들에 대한 많은 부분이 알려지게 되었다.
우선 이 편지로부터 아인슈타인은 연애 당시부터 상대성이론과 통계역학 등
후일 그를 유명하게 만드는 주제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당시에 피조의 1851년 실험과 유사한 생각을 했으며,
에테르를 지나는 지구의 운동에 대한 생각도 했었다.
또한 그는 빈, 볼츠만, 로렌츠, 드루데의 글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연애편지에서도 자신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즉 그는 '우리들의 상대운동에 관한 작업'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면서
밀레바에게 이 문제에 대한 답장을 희망했다.
하지만 밀레바가 이에 대해서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
밀레바와의 협동작업을 희망했던 아인슈타인의 꿈은 거의 일방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서로 가까와지면서 서로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까지 되었다.
하지만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의 결혼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의 집안과 밀레바 집안 모두가 반대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01년 봄 코모 호수(Lake Como)위의
눈덮인 알프스 산록으로 밀월 여행을 떠나게 된다.
당시 둘의 상황은 심적으로 그리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였다.
즉 밀레바는 졸업시험에 한번 떨어진 상태였고,
아인슈타인도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한 뒤에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실업자로 전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 밀월 여행을 통해서
그들 모두 평생동안 물리학을 공부하며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약속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쓰여진 한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이
자신은 지금 레나르트의 광전효과에 관한 글을 기쁘게 읽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밀레바와 함께 한 어린 아이의 안부에 대해서 묻는 내용이 1986년 이후 발견되었다.
이 편지 내용을 살펴보아 짐작컨데,
밀레바는 밀월여행 뒤에 임신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밀레바의 졸업시험 합격 여부가 불확실하게 되었고,
아인슈타인도 결혼을 하기 위해서 서둘러 직장을 찾게 되면서,
마침내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에 취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1년 10월 밀레바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아이를 낳기 위해서
그들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인 세르비아로 갔다.
아마도 여기에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에서 생긴 사생아인
딸 리제를이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1903년 1월 6일 베른에서
그들 사이에 아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위장해서 공개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사생아 리제를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1986년 이들 사이에 오간 편지가 공개되기 전에는
아인슈타인 연구가들에게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이 편지가 공개된 뒤 아인슈타인 전집 출간 기획팀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세르비아 지방의 출생기록과 심지어는 묘비명까지 확인하면서,
그녀의 소재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아마도 그녀가 살아서 태어났다면,
밀레바의 친척에 의해 양녀로 입양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전집 출간 기획팀들은
이 사생아에 관한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1930년대에 아인슈타인의 딸임을 자처하는 한 여인이
독일에서 나타났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인슈타인이 불과 15세였던 1894년 빈에서 태어난 것이 확인되어,
결국 이 사건은 유명인사를 대상으로 한 사기극으로 판명되었다.
아무튼 현재까지 레제를의 존재는 오리무중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어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면
그녀는 90이 넘은 노파가 되어 있을 것이다.
결혼 초기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한동안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등
세 가지의 세기적 논문은 사실 아인슈타인의 신혼 시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신혼 초기에 아인슈타인은 사랑과 물리학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09년에 이르러서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들의 결혼 생활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의 사랑이 식어감에 따라 밀레바는 자신의 학문도 포기하게 되면서
사랑과 함께 자신이 학창시절부터 가졌던 학자로서의 희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더욱이 1914년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연구소 소장으로 추천되어
그곳에서 자리를 얻게 되었을 때,
밀레바가 베를린으로 갔다가 두 아들을 데리고 스위스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서서히 파경으로 치닫게 된다.
이들 부부간의 결혼 생활이 파경으로 향하게 된 배경에는
또 아들 에두아르트(Eduard)의 정신분열증도 문제가 되었다.
즉 아인슈타인은 에두아르트가 정신분열증에 걸린 원인이
밀레바 집안 혈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던 에두아르트는
1965년 밀레바의 자매인 조르카(Zorka)가 정신불안증을 치료받았던 병원이었던
스위스의 한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아인슈타인 아들의 정신병이 밀레바 집의 탓보다는
오히려 아인슈타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과학적 창조성과 정신분열증은 어느 정도 연관이 되어 있다는
많은 역사적인 사례가 그 추측의 근거가 되고 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게 되면서
아인슈타인의 신화가 시작되는 해였던 1919년 2월 14일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서로 이혼을 했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은 밀레바가 키우게 되었고,
아인슈타인의 아들들은 아인슈타인과는 떨어져 살게 된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노벨상을 받게 되면 상금을 이혼 위자료로 줄 것을
밀레바에게 약속했다.
결국 1922년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게 되자,
이 돈은 밀레바에게 전해졌다.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상금을 이혼 위자료로 쓴 것이다.
밀레바와 이혼한 뒤 아인슈타인은 곧바로
6월 2일에 그의 이혼한 조카인 엘바(Elva Einstein Lowenthal)와 결혼을 했다.
그는 이미 딸이 둘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인슈타인 호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그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과의 관계는 다시 좋아지지는 않았으며,
더욱도 악화되어 심지어는 낯부끄러운 인신 공격적인 편지까지 오갔다고 한다.
1948년 밀레바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한 상태에서 스위스에서 쓸쓸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출전: 임경순, 100년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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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독일의 티델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남.
선천성 좌골통으로 평생 다리를 저어야 했음.
관찰과 수학에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는 취리히로 유학,
1896년 스위스 국립공과대학의 아인슈타인과 애정관계로 발전,
결혼 전에 딸을 출산하게 된 그녀는 1903년에 결혼한 뒤
<상대성 이론> <광양자 이론> <통일장 이론> 등의 연구를 공동 진행하여
아인슈타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러나 병약한 둘째 아들의 출생 뒤로 학문은 물론 남편과도 멀어져 1919년 이혼을 하게 됨.
정신질환자였던 둘째 아들을 위해 헌신의 세월을 보내다가
1947년, 주위의 모든 이들로부터 소외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 현재 카메라 사용을 못해서 그녀의 사진 스캔을 못 했다.
흑백 속에 담겨진 그녀의 눈을 보면 눈빛이 살아 있다고 해야 하나.
상당히 지적이고 똑똑한 느낌이 그 눈빛에서 느껴진다.
19년에 이혼해서 47년에 죽었으니 20년이 훨씬 넘게 혼자 살다가 죽은 셈이다.
이제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새 포스트를 시작하면서....>
# 우리는 고전속에 등장하는 유명한 작가들, 죽은 후에도 계속 이름이 알려진 수많은 남자들만을 기억하고 그 옆에서 쓸쓸히 사라진 부인이나 여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 한다.
그 유명인들은 이혼을 하더라도 새로운 여자와 재혼을 했거나, 끊임없이 여자에게 도움을 받거나,
여자 옆에서 생활을 했지만 정작 그들과 헤어진 여자는
혼자 아이를 키우거나,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 재능을 잃어버리고 쓸쓸함에 고립되어 지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 옆에 바로 그런 여자들이 있었기에 성공을 할 수 있는 기반과 아이디어들을 낼 수 있었으며 그녀들의 도움이 컸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끔 생각해보건데 여자들이 결혼 후 누군가의 아내, 그저 가사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는 인생들이었다면 현 시대에 우리가 기억하는 수 많은 음악가, 정치가, 작가 들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도 여자들의 이름이 더 많이 남겨지지 않았을까.
'사랑스런 나의 보물!....
당신이 없다면 생의 의미는 물론 일할 의욕도 삶의 즐거움도 사라져 버린다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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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900년 여름,
21살이었던 아인슈타인이 취리히의 동료인 밀레바 마리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1903년 아인슈타인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 사랑의 편지는 아인슈타인의 <전집> 제 1권에 들어있다고 한다.
<전집>은 1987년에 프린스턴에서 발행된 것이다.
이제까지 아인슈타인 전기들이 과소평가 해오던 그들의 내밀한 관계는, 초기 아인슈타인의 기록들
이 밝혀지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편지들은 그들의 사랑의 발전과정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더욱 놀라운 점은 그녀
가 아인슈타인보다 연상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가 연상이라 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적
여성미를 가진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식 교육을 받은 데다 똑똑해서 학문적인 명예욕도 있는 여자였는데, 아인슈타인에게는
바로 그런 점들이 강력한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서로의 지적 능력을 높이 평가해 마지 않던 이들은 상대에게 갖고 있던 애정과 정열 또한 대단했다.
밀레바 마리치의 짤막한 편지는 그 당시 두 사람의 일상적이고 애정 어린 친밀한 분위기를 매우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토론을 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진지한 파트너였다.
정열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도 곧바로 미분방정식, 이중적분 혹은 전자석 광이론에 대한 화제로 이어지곤 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학문과 사랑은 별개라 할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애인
을 공동 연구의 파트너로 보았다.
아인슈타인이 정열적으로 사랑했고, 지적으로도 높이 평가했던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동등한 파트너 사이의 이 비상한 관계는 결국 어떻게 발전되었을까?
<그녀의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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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첫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가 그늘 속으로 가려지게 된 것은 전기작가들의 탓도 적지 않다.(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생애 역시 거의 모두 남자에 의해 집필이 되었음을 기억해두자) 이들은 천재로서의 아인슈타인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의 부인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데장카 트루브비취 기유리치의 전기에 나오는 그녀는
프랑크, 제리히, 프뤽히거 등이 쓴 전기 속에 나오는 매력없고, 불평꾼에 약간은 미련하기까지 한 부인의 묘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975년 12월 19일, 세르비아의 하사관인 밀로 마리치와 마리아 루칙 사이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그 고장의 유지였으며 친조부모도 부유층에 속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비교적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독일어에도 능했다.
밀레바의 유년기에 관한 정보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녀는 매우 병약한 아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는 늘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선천성 좌골통 환자라는 것과 그 때문에 겨우 걸을 수 있는 정도의 사실이 밝혀지자 더욱 그랫다. 부모가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를 절며 지내야 한 것이다.
이 장애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로 인해 어린 밀레바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녀의 빠른 이해력을 알아챈 아버지가 특히 그녀를 아꼈다. 동네 아이들의 손가락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유년기는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환상의 세계에서 살았다. 몇 시간씩 다락방에 올라가 몽상에 잠기는가 하면 풀밭에 숨어 강과 초원의 생물체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녀의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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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릴 때부터 유독 숫자에 관심을 보였다.
혼자서 몇 시간이고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 일찍부터 피아노 수업도 받았다.
그녀가 보관했던 스케치들을 보면 그림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부모는 그런 딸의 남다른 재능을 사랑했다.
그러나 다리를 저는 것 때문에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부모가 일찍부터 딸에게 여러 교육을 받게 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적지 않게 작용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딸이 훌륭한 수업을 받는데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88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곧 학교를 옮겨야 했다.
여학교나 실업고등학교는 이 재능 있는 아이를 만족시키지 못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소녀들은 인문고등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그녀를 세르비아로 보내기로 했다.
세르비아에는 성별에 따른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890년, 15살의 밀레바는 사바크의 명문인 세르비아 왕실 인문 고등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여기서도 그녀는 남다른 학습 속도로 곧 두각을 나타냈다.
이렇듯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던 그녀가 고향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점이 뚜렷해지자, 부모는 물론 그녀 자신도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공부를 하려면 그것은 외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여자들이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취리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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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공부를 잘 하고 똑똑했다면 쉽게 할 수 있었을 학업이 여자에겐 무척 제한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지, 여자들은 자유롭게 남자들과 동등한 자리에 서기에는 차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죠.
밀레바의 집이 그 모든 경비를 감당하기 힘든 경제적 집안의 소유자였다면 그녀는 대학을 나올 수도 없었을 뿐더러 아인슈타인과의 만남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재능이 뛰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전다는 것 때문에 결혼상대자를 고를 수 없었다는 점도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후반 인생에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합니다. 같은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그녀가 남자였다면, 그래도, 결혼하기는 훨씬 쉽지 않았을까요...
<아인슈타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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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가을, 밀레바는 18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도착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먼 여행을 동반한 가족도 없이 혼자 했던 것 같다. 혼자서 외국에 적응하고, 숙소를 찾고, 최상의 교육과정을 알아보러 다닌 것도 역시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학입학을 하게된 밀레바는 1896년 여름학기에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 공과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 학교가 생긴 이래 다섯번 째 여학생이었으며 그해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동료였다. 재능과 성실성을 겸비한 밀레바는 곧 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밀레바 역시 뛰어난 음악성과 착상, 특이한 외모로 눈에 띄는 천재적인 아웃사이더 아인슈타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들은 모든 수업을 함께 들었고 교수들이 부과한 어려운 여러 과제를 함께 풀었다. 게다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연구도 병행하였는데 이때는 대부분 수업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들에 몰두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곧 보다 깊은 관계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밀레바는 그렇게 발전한 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녀는 결혼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었다.
내가 앞서 설명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결혼 생활이 그녀를 자신의 길(남자동료들처럼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는)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구혼을 물리치며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녀가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리라는 걸 아인슈타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는 그녀가 자신과 동등한 파트너라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밀레바의 저항이 결국 누그러진 것도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학자와 여자라는 자신의 두 가지를 동시에 잘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가 매우 가까워지면서 떨어져산다는 건 생각할 수 없을만큼 같이 사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힘들게 결정한 밀레바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결과를 양 부모에게 알렸을 때 아인슈타인은 자기의 부모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어머니가 반대를 하면서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말들을 했을까.
<아인슈타인의 아이를 가지다 - 물리학자로서의 길에서 멀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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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7월, 그가 애인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머리를 베개에 파묻었다오...
'네 장래를 헐값에 팔아치우고 네 앞길을 막는 거다.'
'그 여자는 점잖은 집안에 시집을 올 수 없어.'
'그 여자가 애기를 가지게 되면 넌 엉망진창이 될 거야.' 등등..>
(# 글쎄, 후에 누구의 앞길이 막혔으며 누구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는가...
반대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쳐도 저 어머니도 여자가 아니었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녀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첫번째 이유는, 우선 그녀의 나이가 많다는 점(네 살 연상)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지나치게 지성적(똑똑하다는)이라는 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에겐 그것이야말로 여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로 여겨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들을 비난했다.
"그 여잔 책이야, 너처럼. 넌 여자를 가져야 해."
"네가 30살이 되면 그 여자는 늙은 마녀가 되어 있을 거야."
그해 여름, 그는 자신이 밀레바와 점잖지 못하게 함께 살고 있다는(?) 어머니의 비방을 단호히 부인했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발전하였고, 최근에서야 출판된 편지들이 비로소 보심스레 지켜온 비밀을 밝혀놓았다.
1901년 밀레바는 임신을 했고 1902년 초, 친정에서 딸을 낳았다.
아인슈타인은 기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재정적인 형편이 어려운데다가 그의 부모가 밀레바와의 결혼을 계속 반대하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성실을 맹세하며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내는 것 외에는 밀레바 마리치에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밀레바의 상황은 더욱 끔찍했다. 그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임신한 딸을 받아준 부모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길에서 완전히 내동댕이 쳐진 셈이었다.
그렇게도 재능이 뛰어난 밀레바 마리치가 왜 아인슈타인처럼 석사학위를 받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주 나온다. 여기에 아주 진부한 해답이 있다.
학생의 신분으로서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는 데다가, 임신한 사실을 숨겨야 했으니 그녀로서는 이미 시작해 놓은 석사학위 논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희망에 잔뜩 부풀어 시작했던 <복합기술학>을 단순한 수료증서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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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편지에서 그들의 아이를 <리저렐>이라고 불렀다. 이 아이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알려진 바 없다.
1902년, 밀레바 마리치는 혼자서 취리히로 돌아갔다. 아이를 부모집에 맡겼는지 아니면 세르비아의 남의 집에 맡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능한 한 아이를 빨리 데려가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인슈타인이 확실한 직장을 구했는데도 말이다.
1902년 6월 아인슈타인은 베른의 특허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었고 1903년 1월 드디어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루었던가...
밀레바 마리치는 아이와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녀는 점점 침울하게 변해갔다고 한다.
언제나 장난스럽고 재미있는 농담을 잘 하던 <장난꾸러기>는 갈수록 진지하고 우울한 여자가 되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품었던 희망과 <리저렐>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 두 가지의 실패는 평생토록 금기사항이 되었다. 그때부터 밀레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의 동료로서만 살게 되었다
퀴리부인과 아인슈타인 부인
마리 퀴리는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남부 헝가리 치하의 세르비아인인 마리치 또한 어린 시절부터 능력을 발휘해 여성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김나지움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수학과 물리학 과목에서 1등을 했습니다.
1891년 파리로 유학간 마리 퀴리는 1894년 피에르 퀴리를 만났으며 이듬해 결혼했습니다. 목사도 신부도 부르지 않았고, 예물 반지도 없는 간단한 결혼식이었으며 신혼여행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시골마을을 여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치는 1896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4년 연하의 아인슈타인을 만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생각을 교환하는 등 학창시절 둘도 없는 학문적 동료로 지냈어요. 그들은 결혼 전에 딸을 낳기까지는 했으나 주위의 시선 때문에 아이가 없는 것으로 위장하다가 1903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전만해도 두사람의 인생은 비슷했는데... 결혼 이후 마리 퀴리와 밀레바 마리치의 학자로서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게 된답니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의 도움을 받아 검전기를 이용한 새로운 분석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고, 결국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해 1903년 박사학위를 받는 동시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들 부부의 연구 환경은 매우 열악했지만 이런 악조건을 정열과 끈기,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이겨냄으로써 얻은 영광이었습니다.
반면 밀레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과의 밀월여행 이후 사생아를 잉태한 심리적 부담 때문에 졸업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결국 박사학위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비록 박사학위는 포기했지만 아인슈타인의 파트너로서 연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수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의 착상을 수학적으로 체계화시키는 데 아내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은 수학 분야에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나중에도(그가 밀레바와 더 이상 공동작업을 하지 않게 된 뒤에) 자신의 착상들을 추론하고 수학적으로 옮기는 데에 있어 언제나 수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5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들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유명해질수록 부부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1919년 결국 파경을 맞게 됩니다. 그 이후 밀레바는 정신질환자였던 둘째 아들을 위해 헌신의 세월을 보내다 1947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초의 유능했던 두 여성 과학자는 각자의 파트너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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