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법화경 - 만화로 보는 불교 이야기 김정빈글-

pia99 2013. 8. 1. 19:54

 

법화경 (묘법연화경)

蓮花란 연꽃을 의미. 연꽃은 뿌리는 더러운 진흙 속에 있으되 꽃은 지극히 청정하고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를 맺는 특이한 꽃이다 따라서 고통과 번뇌의 진흙 속에서 해탈의 꽃을 피우는 불교인의 상징이 되고 수행의 과정과 동시에 그 속에 결과(부처)가 깃들여 있는 미묘한 이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근본경전은 분석적인 이성에 기초하고 반야경은 직관적인 통찰에 기초하고 화엄경에는 수행과 함께 신앙이 보이고 법화경에서는 신앙이 매우 강하게 나타다 이성을 누루고 우위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초기 경전에서는 위대한 스승이었던 석가모니부처님이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무량의수명을 지니신 초월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세존 :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이 세상에 오시느니라. 즉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뜻이니라.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다만 한 부처의 길이 있을 뿐 둘이나 셋은 없느니라.

-> 법화경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대승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길을 셋으로 나누어 왔다

1. 성문승 : 부처님에게 사성제를 배우고 닦아 아라한이 되어 해탈하는 길

2. 緣覺: 부처님이 나시지 않는 시기와 장소에서 자연 이치를 보아 깨달은 성자들의 길-> 나의 의견: 성경은 예수이전에 태어난 자들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지옥에 갔다고  독실한 신자인 친구가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아무리 사유를 해봐도 뭔가 이상해서  교회를 박차고 나왔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중 제가 알고 있는 것도 내용이 다르면 꼬집어 주시기를.... 그런데  불교는 연각승이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3. 보살승 : 무수한 생애를 반복해 태어나서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삶으로써 마침내 성문이나 연각보다 월등 덕이 크고 넓은 부처가 될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길이다.

이중 앞의 둘은 자기 해탈이 중심이고 그 깨달음의 크기와 폭이 작다 하여 소승이라고 하고 보살승을 대승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셋은 각각 다른 길이어서 한 길을 가면 다른 길과는 만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이 세 길은 부처님께서 필요에 따라 임시로 나누어서 보이신 것이지 그 목표는 하나, 즉 한부처의 길(일불승)뿐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사상을 셋으로 모아 하나로 돌아감(會三歸一)

 

부처님께서는 데바닷타(부처님을 배반하고 해하려 한자)까지도 수기를 내리시니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법화경의 대긍정 사상이 불교의 다른 사상에 대한 자랑인 것이다. 가장 악랄했던 데바닷타와 마귀까지도 부처가 되고 불법을 보호한다는 사상 앞에서야 구제되지 못할 자는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과의 작은 인연 하나를 심는 것만으로 그 속에 성불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지는 동시에 존재한다.

 

천태대사는 법화사상을 가리켜 해가 중천에 떠올라 비취면 도무지 그림자라곤 없듯이 모든 것을 다 긍정하는 불교 최후, 최고의 사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세존: 나는 사바 세계에 머물면서 수많은 세계에서 중생을 인도하였고 짐짓 거짓으로 방편을 지어 열반에 든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왕자로서 젊어서 출가하여 부처가 되었다 함은 다만 수준이 낮은 너희를 위해 그렇게 보여 준 것뿐이므로 여래에게는 진실에 있어서 나거나 죽거나 생기거나 없어지는 법이 없느니라. 이는 마치 좋은 의사가 외국에 갔다 오니 백 명이나 되는 자식이 독약을 먹고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의사가 약을 주니 몇몇은 약을 먹고 나았으니 나머지는 독기가 퍼져 약이 약인 줄 모르고 먹으려 하지 않는지라 방편으로 멀리 떠난 뒤에 자기가 죽었다고 소문을 내 슬픔에 빠진 자식들이 효심이 일어나 아버지가 두고 간 약을 먹고 병이 나은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 이 의사가 진정 거짓말을 했다 하겠느냐?

나 또한 이와 같나니, 내가 부처가 된지 무량 무변 ~겁을 지났지만 중생을 위해 방편으로 장차 열반에 들리라고 말하는 바이니, 내가 거짓말한다고 이를 자는 없으리라.

 

->. 나의 의견 : 이 구절 때문에 여타의 스님, 모 단체의 교주님들이 자신의 거짓말을 방편이라고 하여 신도, 수련생들에게 나중에 들통날 것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유인했다.

들통나면 방편이라고 하면 모든 변명이 해결된다. 그것이 합리화 되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인데... 계명에 거짓말 하지 않기가 있다. 그런데 정작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한자는 방편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굳이 자유자재하신 분이 거짓말을 방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까?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나도 처음에는 내가 융통성이 없는 줄 알고 방편으로 삼을수도 있다고 여겼다.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데 직접 경험을 해보니 이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겠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처럼 교주나 스님들의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나중에는 그 사람 말을 믿을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 말이면 우선 의심부처 한다. 그렇다 내 근기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근기에 맞게 굳이 거짓말을 쓰지 말고 정직한 말로 뭔가를 해주시면 안되나. 스님 교주들의 수준이 거기까지인가. 그런데 이런 나의 태도 때문에 이상한 단체에서 나올 수 있었고, 이상한 스님들에게서 나올 수 있었다. 이상하다라는 의미는 그곳에 있으면 얻은 것은 없는데 시간낭비 돈낭비하는 곳을 말한다. 근기 높은 이들이야 거짓말 하시는 분들에게도 성장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본 대다수들은 속았다고 후회하더라는 것이다. 본인의 근기부터 정확히 알고 선택할 일인 것 같다. 나는 거짓말로 방편을 삼으면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부처는 되고 싶지 않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떠신지....

나는 대화의 상대방이 나의 성장을 생각한답시고 거짓말 하는 사람보다 나를 아프게 해도 사실을 진실을 말하는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진실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 거짓말을 굳이 해야할까 ? 안 그러나요 부처님?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실토하신 설법때는 믿음이 충실한 자들만 남았지요. 정말 믿음이 없으면 부처님의 속내를 알 수가 없나봅니다.

 

근본 불교에서 다만 가장 위대한 인격자요 스승이었던 부처님은 법화경에 와서 무량한 수명을 가지신 부처님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룬다는 근본 불교의 입장 또한 믿음과 찬탄 예배 공양 공경으로써도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관점이 도입되었다. 이제 부처님은 이 세계에 항상 머물면서 항상 설법하시는 분이 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외도의 절대신과 유사한 면도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여전히 근본 불교의 기본 교설인 연기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므로 법화경이 외도 사상인 것은 물론 아니다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근본 불교의 단순하고 소박하던 사상을 장엄하고 광대하며 신통 불가사의한 데까지 확장시키는 한편 반야경의 공 사상이 갖는 허무감을 뒤집어 이 세상을 꽉 찬 모습으로 보고자 한 경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