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명상

대승불교-만화로 보는 불교이야기 -김정빈 글

pia99 2013. 7. 31. 16:47

대승불교의 핵심

공의 근거는 초기 불교의 연기법에서부터 찾아야 하는데 연기법이란 모든 사물은 조건에 의지하여 결합되었다가 조건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조건에 의하여 무너지는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전과정은 쉼없는 변화의 연속이므로 무상이요 즐거움과 괴로움의 반복이므로 이며 이 전과정을 진행시키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이다. 이상 삼법인인데 무아는 사물이나 사람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요소의 집합체로서의 사람(사물)은 인정되지만 다만 수많은 요소들은 조건에 의해 임시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음식섭취 + 기후 + 수명을 의지할만한 업 등등) 조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제 3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무아의 의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무리 잘게 쪼게 보아도 거기에 연기법을 초월하는 실체는 없고 잘게 쪼개진 원소 자체도 다시 잘게 쪼개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이 공이다.

그렇게 공하면서도 임시적으로 있는 존재인 인간을 부를 이름은 필요하므로 편의상 나, , , 그녀, 언어가 생겨난다.

조건의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닌 불변, 부동의 실체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인간은 인연의 결합체로서 부단히 흘러가고 있는 존재임이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실체 없음의 진리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도 적용되는 대진리이며 따라서 모든 사물은 실체가 비었다고 말할수 있고 그것이 공이다.

무아: 나가 없음=실체가 없음=실체가 비었음=

 

고통의 원인은 이 공의 진리를 모른 채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있지도 않는 그 []를 보호하고 위한답시고 땀흘러 노력하고 갖은 모욕을 참아내고 있는데, 애써 지켜야 할 나가 텅 비어 버린 성자는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그에게는 불어오는 인연의 바람이 나라는 벽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을 깨달은 사람이 나는 공을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모순이다. 왜냐하면 깨달은 자와 깨달아진 것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

그러므로 공을 깨달았다는 의식까지도 끝없이 비워 나가야만 한다. 나아가 비웠다는 그 의식마저도 비우고 비웠다는 의식을 비웠다는 의식을 비웠다는 것마저 비우고 한없이 비우고 비워서 마침내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경지가 되어야만 완전한 공이요, 곧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단지 깨달음이 일어났을 뿐 깨달은 나는 없다.

 

6바라밀 : 보시, 정진, 인욕, 선정, 지계 . 반야

바라밀을 실천하되 내가 한다는 생각이나 이것을 통해 공덕이나 깨달음 따위를 얻게 되리라는 기대나 희망이 없어야만 참된 공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 주는 자와 받는 자와 주어지는 것이 모두 텅 빈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진정한 베풂인데 그 비어 있은 마음은 허공에 비유된다.

 

諸佛보살의 출현

대승사상은 시방삼삼에는 수많은 보살 수행자와 이미 수행을 이루어 마친 부처님들이 계신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불 이외에 아미타불이라든가 비로자나불 등이 경전에 등장하게 되었고 보살 등도 부처로 경전에 등장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금강경

보살은 마땅히 머무르는 바없이 보시해야 하느니라.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냄은 혜능대사가 이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유명한 구절

일체의 겉모양은 모두 헛되나니, 만약 일체의 모든 겉 모양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본다면 그는 곧 여래를 보리라. -> 일체 사물의 겉모습이 실체가 아님을 능히 본다면 그 때 부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는 즉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것은 진리다라는 생각이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생각까지도 일으키지 않느리라 바로 이런 생각에서 네가지 생각(1. 중생을 건지려는 나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2. 구해진 바 대상이 있다는 생각3. 그들은 열등하고 나는 뛰어나다는 생각 4. 살아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니라

내가 가르치는 진리는 뗏목과 같으니 그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그렇거늘 하물며 진리 아닌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 부처님은 당신이 제시한 진리마저도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실체화하여 생각하는 순간 공의 이치에서 벗어나게 됨을 말씀하신다.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는 대진리 앞에서는 진리마저도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서 이것은 진리라거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거나 하는 차별상이 사라져야 한다. 진리를 인정하는 순간 비진리와의 대립이 성립하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선악. 애증이 생기며 곧 뒤이어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수다원 : 수행을 통해 첫 번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수다원과 : 그 경지

 

   불교에서 마음이란?

이 질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다가 하나로 통합

1. 唯識계열 :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번뇌를 일으켜 고통에 말려드는가를 밝힘 즉 인간이 어떻게 못났는지를 가르침

2. 如來장 계열 : 인간의 마음에 숨은 부처의 가능성을 극한대까지 드러낸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

나중에 통합되어 일심이문 사상으로 정리

일심 1. 眞如: 여래장 : 열반경 등등

2. 생멸문 : 유식 ( 일체 사물이 마음의 분별에 의해 나타난 것일뿐) : 해심밀경 등등

 

즉 마음은 이 두면을 동시에 지니는데 진여의 마음은 허공에 비유되고 생멸의 마음은 허공에 피어난 구름에 비유되고 마음의 구름을 나라고 고집하지 않고 허공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해탈인 것이다.

이 두 마음을 합치는 것이 능가경이고 그것을 정리한 것이 대승기신론이다.

바다는 진여의 마음, 파도는 생멸의 마음으로 비유된다. 현의상 바다 파도라고 부리지만 실은 모두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파도의 본적지가 바다이듯이 중생 마음의 근본은 부처의 마음이고 중생도 진실은 부처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걸 모르고 있는 게 탈이죠. 파도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난 바다가 아니고 파도야!”

중생이 본래 부처를 회복하려면 불법을 깊이 믿고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한다.

 

맑은 눈으로 본다 함은 장미꽃을 보되 그것의 실체가 비었음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장미는 수많은 요소들의 집합체로 거기에는 장미라는 실체가 없음을 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 요소들 마저도 비었음을 아고 집착할게 없어 자유를 얻는다.

 

이와같이 너 나의 가족, 나의 물건, 이 세계를 두루 봄으로써 행하는 낱낱의 일마다 소홀함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대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7말나식(자아, 인격이라고 부른 것, 나라고 여기는 것)은 능동적인 측면에서 의식을 통해 감촉하고 의식한다. 허나 수동적인 측면에서는 자기의 뿌리인 아뢰아식의 은근한 압력을 받는다.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데 말나식이 판단하고 행동한 길들여짐이 속속 아뢰야식 창고에 입력되고 외뢰야식은 말나식에 영향을 주는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도한 상호 의지하여 존재하는 연기이자 공인 것이다.

 

여래장경중 대승 열반경에 중생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곧 불성이요 부처라고 가르친다. - 광산에 있는 금덩어리를보고 제련을 안 했을 뿐이지 왜 이게 금이 아니겠냐? 중생이 곧 부처...

 

소승 열반경 : 이제부터는 법과 율이 너희의 스승이니라

대승 열반경 : 부처님이 짐짓 떠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은 불생 불멸이어서 지금도 항상 설법하시고 중생을 건지지만 무명에 가린 중생은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나는 가지만 가는 게 아니다

즉 열반경은 부처님의 반열반(성자의 죽음)을 소재로 삼아 공 사상의 부정 논리를 뒤집어 대긍정의 논리를 장대하게 펼치면서 삼라만상의 미물들 까지도 마침내는 다 구원될 것임을 가르치는 원대한 희망의 경전. 즉 극악한 이도 그 최후는 지공이 아니니라.

 

 

능엄경(인도어로 된 원전이 없어 위경)

부처는 아난다 존자에게 마음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본다.

그의 대답은 몸안에 잇다. 감각기관에 있다. 내장의 어두운 곳에 있다. 생각이 미치는 곳에 있다.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등등 답변을 했다.

부처는 대답이 모순임을 밝히신 후 [보는 성품]에 대해 가르친다.

아난다여 캄캄한 밤에 등불이 켜져 사람이 물건을 보았을 때 그 물건을 본 것은 성품이니라.

바로 성품이 마음인 바다를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