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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니어그램을 통한 변화 - 1번 완벽주의자형

pia99 2012. 10. 29. 17:37

 

분노를 응시하라!


고수하는 틀과 원칙이 많은 사람들은 그 틀과 원칙만큼이나 내면에 화가 많게 마련이다. 자신이 정한 틀로 인해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지를 살피는데, 이 때, 자신도 모르게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물론 뜻대로 안 되면 될 때까지 독촉하는 경우가 흔하고 끝내 ‘바르게’ 되어지지 않게 한, 자신을 포함한 대상을 책망하기 일쑤이다.

그러다보니 우선 몸의 긴장이 풀릴 날이 없다. 외모조차 꼿꼿해 보이게 하는 일상적인 긴장은 좌절의 순간에 끝내 분노로 폭발한다. 그러나 빈번한 그들의 분노 폭발을 정작 자신은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가끔 “내가 무슨 화를 내고 있다는 거냐?”며 따지듯 묻는 1유형을 보는데 묻고 있는 그의 얼굴은 이미 분노로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쏟아내는 말 마디마디가 의미 전달 도구라기보다는 소리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움과 위압감 때문에 듣는 이로 하여금 오직 피하고 싶은 무기로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분노의 폭풍이 지난 후 ‘더 제대로, 더 올바르게’ 상황을 만들지 못한 자책감이 엄습하면 그 비난의 칼날은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어지간해서 그 자책으로 인해 쓰러지는 법은 없다. 이내 타협 없는 전사의 꿋꿋한 모습으로 돌아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 개선하고자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기도 전에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남도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그 순간들을 알아차리고 휘말리지 않는 것은 아무리 1유형들이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라한들 역시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내면의 역동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치열한 노력으로써만이 가능하기에 노력의 귀재들인 그들이 하고자만 한다면 오히려 잘 해낼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분노라는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게 어렵다면 먼저 몸의 현상을 지켜보는 것을 권한다. 얼굴은 상기되고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저 배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받는 사생결단의 맹렬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아 돌면서 피부 조직이 굳어가는 신체 감각을 느껴보는 것이다.

명료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판단대로 상황을 만드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아둔하게 흐려진 의식의 한 중간에 자신이 와있음을 인식하는 것! 이 통찰은 한 사람의 생에 있어서, 의식변화에 있어 실로 혁명적인 도약이 아닐 수 없다. 

무척 어려운 듯 보이는 이런 과정은 감정에 상응하는 신체감각을 감지하는 작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신 현상보다는 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기가 쉽다. 이렇듯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 대상화하는 것만으로도 반사적으로 내닫는 분노의 파괴성에 속지 않을 가능성이 증가하게 된다. 그래서 무차별하게 뿜어내는 분노의 독에 자신이나 주변이 다치지 않게 될 여지 또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배아래서 어떤 덩어리가 올라오는 느낌과 동시에 온 몸으로 퍼져가는 열감을 느껴보라! 그 열감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를 거쳐 가는지, 그 뜨거움의 강도는 어떤지, 세졌다 감소되는 움직임은 있는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올라가 머리 뚜껑을 튕겨나가게 하는 것 같은 세찬 기운으로 인해 입 끝이 당겨지면서 강한 발음과 내용들이 거칠게 쏘아붙여짐을 단순하게, 오직 그 물리적 느낌을 단순하게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관찰이 세밀해지다보면 뜻하지 않은 대어를 낚기도 한다. ‘자신의 부족을 비판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극되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더욱 무자비해진다’는 깨달음의 대어를!

이 세상의 현명한 안내자를 자처하며, 그럴 때만이 자신이 가치 있다는 신념을 발달시켜온 1유형들은 의외로 그들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완벽에 대한 지향과는 대조적으로 세상을 불신하는 습성이 뿌리 깊다. 불신할 줄 모르고 세상에 의존하는 어린 아이의 순진성을 일찍이 잃어버린 것이다. 쉽게 믿지 못하고 책임을 떠안는다. ‘애어른’이라는 별명이 자연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현명한 지침을 자신이 갖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데 순진한 어린 아이의 상태에 노출되어 있으면 그 상태의 정보는 늘 미숙하고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조바심이 있는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제 나이의 삶보다 노숙하게 무장하고 다그친다.

그러니 어지간해서 자신이나 타인의 부족을 너그럽게 보아줄 여유가 없다. 어지간한 유머조차 그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린 짓’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세 살 손자의 생각 없는 어리광에서도 버릇없음을 찾아내고  ‘저대로 방치하다가는 고약한 모습이 될 지 모른다’ 는  생각에 바로 매서운 훈육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렇듯 타인을, 자신의 ‘현명한’ 지침과 다르게 처신하는 타인을 잘 믿어주지 못하는 모습은 실상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결과이다. 당장의 행위여부와 상관없이 완벽하게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믿음,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완벽한 우주의 모습을 상기하고 존재를 만끽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조바심과 의무감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다.

그 조바심과 의무감은 시도 때도 없이 누구보다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한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것 같은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자극되면 자기도 모르게 강박적으로 주변을 점검하고  자신에게 올지 모르는 비난의 화살을 외부로 향하게 하고더러는 ‘무자비’하게 교정을 위해 다그친다. 그러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분노의 활화산에 스스로를 내몰고 방치하는 것이다.

자신을 수용하고 자신의 판단을 강박적으로 검열하지 않을 때 다른 이도 수용하고 그들의 판단과 처신도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음을 망각한 모습이다.

‘자신이 중요한 인물임을 느끼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굳이 그런 주장을 펴는 명망가의 이름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사에서 쉽게 발견되는 법칙이다. 하지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집착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타인을 ‘미숙한 어린 아이’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들이 감당할 몫을 1유형 자신의 것으로 끌어오는 우스꽝스런 현상도 결국 이 법칙이 무시된 결과이기도 하다.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중요성을 상실케 하고 세세한 것조차 검열되고 판단 받는 어린 아이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자기 존재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곳에 책임도 느낄 필요 없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에 내사되어 있는 판단의 소리, 비난의 소리를 알아차리고 자신과 분리시키는 일상에서의 수련과 이 작업이 되지 못함으로써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 일게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 자신에게 가장 현명해 보이는 지침대로 되어지지 않아도 세상은 큰 탈 없이 돌아간다는 것, 세상은 자신에게 과도한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일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된다는 것, 신은 자신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도 역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분노와 강박적 의무감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신체감각으로 느끼는 작업을 지속해줄 때  평화는 성큼 그들에게 다가와 있게 될 것이다.✍                 

 

 신미영․에니어그램영성센터


출처 : 자기계발과 마음공부를 넘어서
글쓴이 : 와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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